차이야기

차살림 - 고요와 풍류

에세이 쓰는 여인 2023. 11. 25. 05:20

매월당의 차살림에서 발견되는 여섯 가지 특징 - 5.6

 

1. 차살림

2. 차 끓이는 땅화로

3. 낮고 작은 방문

4. 차사발

5. 고요함

6. 풍류를 즐기는 법

 

 

매월당 차풍의 다섯 번째 특징은 생명의 신비이자 근원인 고요함입니다.

그의 차시에 응축되어 있는 향기이자 불멸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는, 고요함의 형상은 살아 숨 쉬는 자연 그 자체가 매월당의 차 정신이기도 합니다.

 

 산에 달 뜨면 등불 되고
   소나무에 바람 불면 관현악이네.
   
 두 귀에 아무런 들림 없이 홀로 앉았을 때
    반쯤 내린 발 비낀 저녁 해 꽃가지에 비친다.

 

 낭랑하게 시 두어 편 읊었더니
    뭉게뭉게 봄 구름이 떠오르네

    땅에 내던져도 아무 소리 안 들리나니

   나한테 삼천 말의 벌주酒나 주소,

 어젯밤 산중에 비 오시더니
    돌 위로 흐르는 물소리 들린다
    창에 새벽은 오려 하고
    나그네는 우짖는 새소리에도 잠들어 있다.

 아득한 안개 노을같이 깨끗하고
    고와라 물 위의 달이여, 맑은 성품이여,
    한가로이 종일 잠들어도 찾는 이 없고
    맑은 바람 절로 와 대 난간을 흔드시네.

 날 따뜻해지면 들꽃 피어나고
    바람 훈훈해지면 처마 그늘 더디 가네.

 

 

종이 휘장 창포 방석 흙 구들이 따뜻한데
    남쪽 창 붉은 해에 매화의 넋이 따뜻해라.

 

소나무 그늘 속 중은 정에 들었고

   청미래 칡덩굴 얽힌 담 위에 활짝 핀 이끼 꽃



 매미는 잎새 밑에 숨었지만 소리는 깔끄럽네

   시냇물 복판에 꽂힌 무지개 그림자의 뿔이여. 

 대 쪼개어 찬 샘물 끌어 대어 놓았더니


    졸졸졸 밤새도록 울어대누나.
    가는 소리 꿈과 섞여 목이 메이고
   맑은 운치 차 끓이는 데 들어간다네.

 뜰 가득한 그림자 이끼는 푸르게 빛나고
    하늘 반만큼 소리 흔들어 밝은 바람 차갑네.



 고요 속에 사는 뜻이 움직임을 기뻐하여
    산바람 불어 계수나무 꽃가지 꺾어놓았네.

 달 잠긴 푸른 시냇물 떠다가

    푸른 돌솥에 끓이리라.


밤에 듣는 소리는 패옥같은데

     새벽에 물 길으면 빛이 옥 같네

 

 절 아이 산차를 달이려
      달이 담긴 찬 샘물 길어오누나.

 새벽 해 떠오를 때 금빛 전각 빛나고
      차 김 날리는 곳 서린 용이 날개 치네.

 

 절이 오래되어 솔은 천 길이나 자랐고
     산 깊어 달이 한 무더기라.

 



매월당의 고요함은,

'달이 잠긴 푸른 시냇물, 푸르게 빛나는 이끼,

맑은 운치를 넣어 끓인 차, 시냇물에 꽂힌 무지개 그림자에 난 뿔,

활짝 핀 이끼 꽃, 남쪽 창에 비친 붉은 해, 소리 없이 움직이는 처마그늘,

대 난간을 흔드는 맑은 바람,

먼동 터오는 창밖에서 우짖는 새소리,

솔바람 소리,

반쯤 내린 발에 비낀 해'

 

처럼 청청 살아서 빛나고, 숨 쉬고, 날고, 뛰고, 흐르고, 소리치지만 오직 깊이를 더한 뿐인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만들고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의 완전한 존재가 지닌 참모습을 깨달은 데서 획득된 것 같습니다.


매월당 차살림의 여섯 번째 특징으로는 창밖의 자연 정취를 방 안으로 들여서 풍류를 즐기는 멋을 꼽을 수 있습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대지의 맥박을 느끼게 하는 엷은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개울 물소리,

 

아지랑이 사이로 보이는 농부의 느리고 부드러운 소 모는 소리,

 

물오른 솔숲 송홧가루 날리는 깊은 산에서 고사리 꺾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릿한 노랫소리,

 

뭉게구름 흐르는 하늘가에서 봄빛을 찬탄하는 종달새 울음소리

 

를 듣기 위해 열어젖힌 방문 안에는 매월당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차 향기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기 시작할 즈음 뜰 앞의 매화꽃 이파리가 포르르 바람에 흩날립니다.

봄날 풍경이 저물기 시작하자 새벽녘 먼동 터오는 기척 사이로 휘파람새가 여름 소식을 전합니다.

소낙비 묻어오는 먼 산 바라보며 달이는 차는 오래 기다린 소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지요.

 

비 그친 뒤 불어난 계곡 물소리를 불러들이기 위해 계곡 쪽으로 난 봉창을 반쯤 열어 두고,

 

향하나 다시 꽂으며 차를 마십니다.


낙엽 져 수척해진 가을 산이 바라보이도록 방문을 반만 열어놓고,

잎 떨어뜨린 나무 몇 그루 호젓이 서 있는 뜰의 서늘한 달빛 고요를 얹어 차를 달입니다.

뒤란 해장죽 잎에 싸락눈 내리는 소리 들으며 찻물 끓이고,

새벽빛이 먼동으로 차오르는 기척에 읽던 경전 그대로 둔 채 차 한잔 마십니다.

이렇듯 불멸의 풍경을 병풍이나 족자처럼 들일 수 없을 때는 수묵화로 그려 벽에 걸어 두고 차를 마셨는데, 이것은 자연과 한 몸이 되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생겨난 지혜였습니다.

 

'묵적 墨, 육조파경도六祖境圖, 한산도寒圖, 달마도達磨圖' 등을 먹으로 그려 걸기도 했는데 수행의 사표로 삼기 위해서였지요.

매월당의 이런 차살림은 그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사찰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과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시켰는데,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설법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인간의 문화와 가치관이 다르고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속에서도 여전한 진리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차 한잔에 자연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한 매월당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한국차살림> / 정동주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