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음식사

개항기에 서양인은 서울에서 어떤 식사를 했을까?

에세이 쓰는 여인 2023. 12. 21. 06:50


1. 개항기 서양인의 식사


조선 정부는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했으며, 같은 해 독일, 1884년에 러시아와 이탈리아, 그리고 1886년에 프랑스와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서양 각국과의 수호조약 체결과 공사관 설치이후 서양인들의 왕래가 본격화되었다.

서울에 서양인들이 드나들면서 그들이 먹던 음식도 함께 들어왔다. 특히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이후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볼 기회가 그전에 비해 훨씬 많아겼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 군대가 서울에 들어올 때 함께 왔던 상인들 중 일부가 그대로 남았고, 그해 11월 이후에 다시 일본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83년 일본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은 후 일본 공사관을 서울 남산 밑에 지었다.

당시 서울에 거주한 일본인은 100여 명쯤 되었는데, 1895년에는 가구수 500호에 1,800명을 넘었다.

서울에 체류하는 일본인과 중국인은 평소 즐겨 먹던 식재료를 조선에서도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음식 재료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은 서울에 도착한 이틀째 아침이 되어서야 프랑스 영사관에서 고향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유럽식으로 차린 아침을 들 수 있었다. 이런 횡재를 맛본 것은 사실 얼마나 오랜만의 일인가? 여하튼 이 고마운 횡재가 나에게 주어졌고 나는 그 기회를 실로 과감하게 활용했다. 공사의 쾌활함과 왕성한 식욕이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으며,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음식과 진품의 포도주 덕분에 시간은 황홀하게 흘러갔다."

 

1888년에서 89년 사이에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의 여행가이자 지리학자 겸 민속학자인 샤를 바라(Charles L. Varat, 1842~1893)는 여행 도중 음식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고 한다.

“내가 일행에 어떤 문제가 없는지 둘러보는 동안 사람들이 내 식사를 준비해서 납작한 조선식 탁자에 차려놓았다. 나는 내가 가져온 가방 하나에 걸터앉았는데, 둘러보니 그 밖의 가방 몇 개 외에 목침 하나와 깔고 잘 거적 하나가 방안의 가구 전부였다. 벽은 벽지를 바르지 않은 상태로 흰색이었고, 대들보로 받친 천장과 연기가 스미지 않도록 기름을 먹인 종이를 바른 바닥이 덩그러니 시아에 들어왔다. 마침내 식사를 시작한 나는 수프를 맛보는 순간 생각이 나서, 내 중국인 요리사에게 빵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에 온 샤를 바라는 자신의 음식을 해결할 전문 요리사로 중국인을 채용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었다. 당연히 매 끼니를 완벽한 프랑스 음식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그는 조선에 오면서 몇 가지 통조림과 포도주,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를 따로 준비해 왔기에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통조림은 샤를 바라에게 매우 유용한 식량이었다.

그는 콘비프와 거위 간 파이, 송로버섯 통조림을 꺼내서 주막의 쪽마루에 앉아서 먹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식사 모습을 조선인들이 구경하며 얼마나 신기하게 여겼는지를 책에서 상세하게 묘사했다. 


2. 먹거리를 직접 챙겨 온 서양인


이와 같이 당시 조선에 온 서양인들은 통조림 등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직접 챙겨 왔다.

당초 자신들의 나라에서 떠날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인지, 아니면 중국이나 일본 등 중간 기착지에서 구입한 것인지알 수는 없다. 샤를 바라는 통조림뿐 아니라 포도주도 여행 가방 속에 넣어서 조선을 찾았다.

 

이처럼 먹을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했지만, 적어도 1895년 이전에 서울을 찾은 서양인들에게 잠자리 문제만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왜냐하면 서울에 서양식 호텔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득불 그들은 조선 정부에서 내준 민간의 살림집이나 조선식 가옥을 개조한 자국 영사관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1882년 11월 이후 조선에 온 서양 여행가들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임시 숙소로 이용했다.

오늘날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이 기구에 소속된 관원들은 청과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에서 온 외국인을 접대하는 일도 맡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있던 장소는 오늘날 서울 재동의 헌법재판소 근처로 여겨진다.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1882년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협판에 임명되자 자신의 구택(宅)에 사무실을 두었다.

외양은 비록 조선의 기와집이었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수리하여 집기를 갖추고 숙소로도 사용했다.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은 1883년 12월 중순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내려 서울로 들어온 첫날밤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묵었다.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내부를 이렇게 묘사했다.

 

“방은 유럽식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외제 탁자와 의자가 눈에 띄었다. 이 물건들은 얼마 전 왕에게 선사된 것으로 -후에 안 일이었다ㅡ 집을 꾸미기 위해 특별히 왕궁에서 가져온 집기들이었다. 경호원이 유럽 비스킷이 든 상자를 꺼내 오고, 맥주를 몇 병 땄다. 모두가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으나 강한 흥분 같은 감정은 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앉아서 웃음 지을 뿐이었고 추위로 몸을 떨었다...... 조선에서 만든 목재 침대가 있었는데, 합판과 얇은 나무로 된 한 자 정도의 네모진 상자로 그 위에 요가 깔려 있었다. 나는 거기다 시트와 담요를 더 깔았다."

이어서 퍼시벌 로웰은 자신이 대접받은 음식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조선인의 재간으로 만든 가구들로 생활하면서 서양 요리의 재료에 관해서는 나보다도 더 모르는 요리사의 요리를 먹어야 했다. 그것도 성공작일 경우에 한해 시식 대상으로서 말이다. 요리사는 조선인들이 나를 위해 나가사키로부터 불러들인 일본 사람이었다........ 요리사 외의 모든 시중꾼들은 조선인이었는데 너무 많아서 한둘을 빼고는 제대로 이름을 기억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퍼시벌 로웰이 이렇게 환대를 받은 이유는 1883년 8월 민영익이 포함된 조선 사절단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을 여행 중이던 그가 통역을 맡아 미국까지 안내를 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3.  중국인을 요리사로 데려온 서양외교관


1880년대 중반 이후 서울에 서양 각국의 외교관들이 주재하기 시작했다.

뵐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1848~1901)처럼 아예 조선 정부에 관리로 채용되어 외국과의 통상 업무를 자문하던 서양인도 있었다.

또한, 프랑스와의 수교로 가톨릭이 합법적인 종교가 되자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들도 조선에 들어와 서울과 지방에서 살았다. 묄렌도르프 부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서양인들 숙소에서 음식을 담당했던 요리사는 중국인이 많았다고 한다.

 

뵐렌도르프 부인은 1883년 가을 중국 즈푸(芝罘)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섯 명의 하인을 중국에서 데리고 왔는데, 그중 두 명은 요리사였다.

1898년 미국 공사관 1등 서기관으로 서울에 온 윌리엄 샌즈(William F.Sands, 1874~1946)는 “여러 사람과 식사를 할 때면 요리를 하고 접시를 닦는 중국인들이 필요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양에 처음 온 영국인 · 프랑스인 · 독일인 · 러시아인들은 좋은 요리사를 양성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자기 나라 요리 기술을 가르쳤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일급 외국인 요리사를 대사관이나 상사로 데려와 중국 요리사를 훈련시켰다"라고 밝혔다.

윌리엄 샌즈에 의하면 1898년경 서울의 외국 공사관들은 정동에밀집해 있었는데, 그곳에 볼품없는 외교클럽도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 러시아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미국 공사관 등이 있었고, 담으로 둘러쳐진 좁은 공사관 거리 양쪽 끝 중심부에 미국 선교사의 클럽과 테니스 코트, 그리고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로 알려진 외교클럽이 위치해 있었다.

1894년 12월 18일 서울 주재 미국 공사 시일(John M.B. Sill, 1831~1901)은 미국 국무성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이른바 미국파(American Party)를 대표하는 사람은 현재 학부대신으로 워싱턴조선 공사를 지냈던 박정양(朴定陽)이다.

외무협판 이완용(李完用)과 농상협판 이채연(李淵)은 각각 주미 조선 서리공사로서 일정 기간워싱턴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법무협판 정경원은 시카고만국박람회 출품대원으로 미국을 다녀온 사람이다."  시일의 보고에 따르면 정동구락부는 1894년 12월 이전에 발족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고위급 관리들과 서양 외교관들은 정동구락부에 자주 모였다.

그 자리에 커피나 와인은 빠지지 않는 메뉴였을 것이다.

1890년대 초반 서울 정동은 서양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