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음식사

1800년대 후반 음식사 - 일본인의 이주와 식품공업의 유입되다

에세이 쓰는 여인 2023. 12. 21. 17:07

 

 

1. 한반도에 영향을 끼친 일본인의 식생활

 

한반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한국 음식의 변화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특히 그들은 특정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식생활을 유지 · 개량했다.

일본인들의 식생활은 오늘날 한국 음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①두부

 

1900년대 들어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급속하게 늘어났다.

1909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은 가구 수 7,745호에 2만 8,788명에 이르렀다.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서울에는 소규모 일본식 식품공장이 들어섰다.

일본인이 파는 두부는 이미 개량되어 제법 위생적인 공정을 거쳐 제조되었다.

그러니 조선인의 눈에도 일본인이 파는 두부가 더 좋아 보였을 것이다.

1909년 6월 29일 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잡보'에는 '일인 두부회사'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경성과 용산 사이에 있는 일인 두부장사가 백 명가량인데 그 이익이 불소( 少)하야 부자 된 자가 많은지라  근일에  그 일인이 협의하이 만여 원 자본으로 두부회사를 조직하고 큰 이익을 취코자 한다는데, 한국인은 본국에 있어서 많은 영업에 하나도 참여할 이 없다고 한탄하는 자 많다더라."


이에 종래의 조선인 두부 판매상인 조포상(商)들이 새로 생긴 문물인 신문에 두부 광고를 내기도 했다.

1910년 8월 9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두부 제조 동업자가 모여 조합소를 설립해 가격을 정하고 위생에 주의해 두부가 상하지 않도록 목판에 진열해 판매하니 편리하게 이용하길 바란다는 광고가 실렸다.

하지만 조선인이 제조·판매하는 두부는 조선인만 소비할 뿐이었다.

1911년 5월 19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의하면, 경룡두부회사가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은 <매일신보》의 '식산계 실린 '경성의 두부 제조'라는 제목의 글이다.

 경성 고시정(市町)의 경룡두부회사는 거(去) 명치(明治) 42년 중에 경룡의 두부 제조자가 합동 설치한 자(者)인데, 지배인은 도이(土居) 씨로 추선(推) 하야 일시 기계력(機械力)을 사용하였으나 일반의 수용은 그 시기가 아님으로써 현금(지금은 수만식(手挽式)에 의하야 직공 25명, 매자) 88명을 유(有) 하야 약 2천 개식의 두부 두조(豆糟) 급() 3천5백의 구약)을 제조 판매하는데, 그 사업은 목하 에 점차 발전하고 그 제조의 원료는 강원도산의 상등 대두를 용(用)하되 1개년에 소비액이 약 1천2백 식이요. 구약의 원료 되는 구약분은 대판(人)으로부터 이입하되 1개년에 약 1천5백 관(貫)(1 관목 3원)을 사용한다 하며, 상차) 또한 두부 제조자는 경성에 11호. 용산에 10호인데, 그 산액은 21호를 합하여도 동사(同)에 불급(不하며 특히 구약은 해사(社)의 일수(手) 판매에 귀(歸) 한 상태인데, 경의 수용(用)을 공급하고 차기여(且其餘)(그 나머지]는 경부(京釜), 경의(京) 연선(線)의 각지에 반출하는 자(者) - 1일에 약 5백 개라더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근현대한국인물자료'에 의하면, 경룍두부회사의 지배인인 도이 가즈요시라는 인물은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으로 1907년 한강을 통해 들어온 쌀을 용산에서 받아서 정미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정미업을 그만두고 조선에 주둔한 일본 육군에 생필품을 납품하면서 동시에 지금의 용산구 청파동 3가인 청엽정(町)에서 양돈업을 시작했다.

그는 경성과 용산의 양돈업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1909년에 경룡두부회사를 설립했다. 1911년에는 도 이 양돈장(土#豚場)과 과수원까지 운영하면서 상당한 부를 쌓았다.

'근현대한국인물자료'에서 참고한 《경성인물》에 의하면 1921 년에도 도이 가즈요시는 양돈 양계업에 종사하면서 경룡두부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자료를 통해서 도이 가즈요시라는 인물이 1907년부터 1921년까지 경성에서 돼지고기 닭고기 · 두부 · 과일 등의 식재료 공급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②식품공장


1910년대부터 근대적인 식품공장을 개설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1920년대까지도 이를 줄기차게 이어갔다.

일본 내에서 성공한 소규모식품공장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황금광처럼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었다.

도이 가즈요시가 운영했던 업종 말고도 장유업(醬油業)· 제분업(製粉業)·전분업(業)·주조업(業) 따위가 모두 일본인의 주도로 경영되었다.

 

그야말로 일본인에 의한 근대 식품공업이 한반도에서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③도자기 공장

 

조선으로 이주한일본인 중에는 요업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어로 요업이란 흙을 가마에서 구워 도자기 · 벽돌 기와 따위의 물건을 만드는 공업을 가리킨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대거 추방되었던 서울의 일본인들은 1883년 이후 다시 들어와 남산 아래에 자신들의 거주 지역을 만들었다.

이들 중에는 요업 전문가들도 있었다.

집이나 건물을 지으려면 기와와 벽돌이 필요했고, 동시에 전선을 고정시키고 절연하는 데 사용하는 뚱딴지(애자)도 많이 필요했다.

여기에서 일본식 요업이 출발했다. 19세기 말이 되면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의 여러 도시에서 요업공장이 자리를 잡았다. 고려요업 · 조선업 · 경성요업 등의회 사가 식민지 시기에 있었던 대표적인 요업공장이다.

요업공장의 사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서 실제로 흙을 다루는 장인들은 주로 조선인이었다.

그들 중에는 예전에 옹기나 도자기를 만들었던 사람도 제법 많았다.

서울에서는 지금의 영등포구 대방동 일대에 크고 작은 요업공장들이 들어섰다.

이들 공장에서는 뚱딴지는 물론이고 술도가에서 쓰는 세무서 검정의 옹기 술독. 그리고 지금의 안국동 일대에 있는 개량한옥을 짓는 데 쓰인 기와 등을 만들어냈다.

또한 조선식 도자기뿐 아니라 일본식 도자기도 생산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오늘날 이천도자기의 명성을 대표하는 유근형(福祿, 1894~1993)도 대방동의 일본식 도자기 공장에서 처음 그릇 굽는 일을 배웠다.

그는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에 있는 도자기 공장에서 3년여 동안 일을 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1924년 2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조선의 요업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침식당했는지 밝혀져 있다.

특히 당시에 식기나 변기로 도자기를 사용하는 유행이 퍼지면서 성공한 일본인 요업자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중 평안도 진남포에서 고려청자와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도미타 기사쿠 1958~1930)라는 인물이 유명하다.

그는 1897년부터 곡물 가공업과 미곡 거래를 하는 회사의 타이완(臺灣) 지점장으로 근무하다가 후에 조선 지점장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조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평양 옆의 진남포에서 도미타상회를 열고, 공예품 생산과 판매에 주력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조선 공예품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통영에 칠기전습소를 만들었다.

또한 진남포에서는 고려청자를 재현하기 위한 요업공장을 운영했다.

그는 '조선미술공예관'이란 갤러리도 운영하는 등 조선의 문화예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1차적 목표는 장사에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2. 서울에 자리잡은 근대 음식점의 위치

 

이렇듯이 개항기를 거치면서 중국 음식점과 서양 음식점, 그리고 일본 음식점이 서울을 비롯하여 원산·부산·마산·군산·목포·제물포 등지의 개항장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들이 조선인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하지만 1910년대 이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 양상이 달라졌다.

가령 일본인들의 거주지와 상가가 밀집해 있던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는 일본 음식점이 들어섰다.

이에 비해 조선인의 주거지와 상가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서울 종로구에 위치했다.

 

①조선요리옥은 청계천 일대에서 성업한 반면,

②국밥집은 주로 종로 북쪽에서 조선인 손님을 맞이했다.

③지금의 서울 을지로를 경계로 하여 북쪽은 조선 음식점, 남쪽은 일본 음식점이 있었다.

④조선 음식점과 일본 음식점이 자리 잡지 않은 틈새 위치인 지금의 서울 중구 태평로 일대에는 중국 음식점이 들어섰다.

 

1910년대 들어 서울 사대문 안은 그야말로 근대적 음식점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