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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마치 우리나라 원래 차인 것처럼 일상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전통차보다 매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회사에 가고, 학교에 간다. 한 집 건너 커피숍이다. 

 

우리 차는 이제 일상이 아닌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차를 즐겨마시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차 문화와 차문화에 대한 글을 지속적으로 쓰게 되었다.

오늘은 차에 대한 첫 번째 글로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야생차 꽃



'차 문화'라는 말은 이제 매우 일상적인 말이 됐다. 이것은 차라는 음료가 단순히 갈증을 해소하고 몸을 치유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차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물과 장소에 애정을 쏟으며 만족과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차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연둣빛이 도는 녹차와 짙은 적갈색의 홍차가 같은 찻잎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놀란다. 구불구불한 모양을 한 한국의 덖은 녹차와 다리미로 눌러놓은 듯 빳빳한 일본의 증제녹차 역시 같은 찻잎으로 만들지만, 우러나는 색도, 맛도 다르다. 하나의 찻잎이 모양도 맛도 다르게 제조된다는 것은 차가 주는 큰 즐거움이자 매력이다. 그리고 그 다양함 속에서 풍부한 문화가 꽃피었다.

앞에서  차가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랑받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시대의 기호에 따라 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가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차나무에서 잎을 따 활용하게 된 시점부터 차는 인간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끊임없이 다방면으로 풍족함을 주었다. 

처음엔 생산 지역에서만 즐기던 것이 비생산 지역으로도 보급됐고, 덩어리차에서 말차로, 잎차로 변화했다. 

 

차 마시는 습관  끓여 마시고(자차법), 타서 마시고(점차법), 우려 마시게(포차법) 

차 문화 확산 1. 중국 남방의 도가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북방으로 전파되면서

                     2. 불교적이고 유교적인 절제와 절대성, 구체성이 더해졌다.

 

문화는 공유되고 학습되면서 축적되는 것인지라 문화의 요소를 갖춘 차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음료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 문화는 계속 변화하면서 발전했다.


 처음에 찻잎을 따는 것으로 시작해서 더 많은 사람의 노고가 더해져 차는 음료로 자리를 잡았다.

초기에는 독립적인 맛을 내기가 어려워서 첨가물을 넣어 마셨다. 파라든가 생강, 귤껍질 등을 넣어 함께 끓여 마셨다. 이후 재배와 제조 기술이 쌓이면서 차는 비로소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찻잎을 딸 때부터 마실 수 있는 차로 완성될 때까지 수월한 작업은 없다. 

이른 봄 다원에서 어린 찻잎을 따는 수확자의 손놀림은 매우 빠르다. 

마구 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잎을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수확한다. 

일반인이 흉내 낼 수 없는 판단력과 속도다. 이후에도 수확한 잎을 분류하고, 위조萎凋하고, 건조하는 등 차가 완성되기까지 거치는 여러 공정에는 많은 전문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차에 관심 있는 사람이 찻잎의 모양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처음에야 호기심과 심미적인 관심이겠지만, 결국은 그 안에 담긴 생산자의 노고와 전문 기술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만들어진 찻잎의 경이로움을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모양이 예쁘고 신기할 뿐만 아니라, 멋진 향과 맛에 차를 보고 마시면서 항상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관심의 확장이 곧 문화가 되고 그 문화를 공유하고 변화시키는 힘일 것이다. 

작은 찻잎의 모양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확장되는 세계는 넓다.

 차를 통해, 차를 마시는 사람을 통해 축적되는 문화의 내용은 매우 풍부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풍부함이 또한 사람을 매료한다.

황금과 같은 차


 역사를 돌아보면 잎이 황금을 능가하기도 했고, 흙으로 빚은 몇백 그램의 다호茶壺(teaport)'가 황금 2킬로그램과 맞먹기도 했다.

일상의 사발에 특별한 이름이 붙여지고, 그것은 곧 보물이 됐다. 바로 찻잎이 그랬고, 다구가 그랬다.

이는 차와 다구를 만들 때 그 가치 확립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그 차와 다구가 아름다움과 희소성 그리고 권위를 갖췄음을 의미한다.

 예술 가치가 있는 소장품이라면 그 소재의 가치와 상관없이 황금을 능가하는 가격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소비재라면 한계가 있다. 그해에 생산해서 그해에 소비해야 가장 좋은 차가 황금의 가치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또 희소성과 권위는 어떻게 구축했을까?


 중국의 전통시대는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였다. 황제라는 절대 권력 아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치의 창출이 가능했다. 황제에게는 통치 지역의 모든 산물을 향유할 권리가 있었으므로 각지의 귀한 특산물은 황실로 진공 됐다. 

 

 차도 그런 진공품의 하나였다. 황제에게 바치는 차가 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황금을 능가했던 것은 아니다. 생산이 부족하지 않다면 황제에게 바치는 일정 수량 외에 나머지는 민간에서도 판매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자 민간에서 판매되지 않는 황실만의 차를 제조하게 되면서 차의 가격과 권위는 최고조에 달하게 됐다. 바로 999년부터 중국 송대 복원에서 황실의 차, 즉 북원차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해에 공차의 공급 방식을 바꾸는 획기적인 조치가 단행됐다. 각 지방의 상등품 차를 황실로 상공 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공차 지역을 한 군데로 한정하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복건로의 복원이었다. 북원차는 이렇게 단일 지역의 어차로서 시작됐다.

이 조치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다. 즉 민간의 차 생산과 소비 활성화를 통한 국가 수입 확보에 황실 수요가 방해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황실 차의 권위를 높였다. 당시에는 차에 대한 징세가 국가 재정에 기여도가 높았고 요긴했으므로 이를 방해하는 기존의 공차제도는 고칠 수밖에 없었다. 황실은 여러 지역에서 받는 공차를 포기하는 대신 황실만의 절대적 가치를 만드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전국 30여 개 주에서 상공 하던 공차는 단일 지역인 북원에서만 공급하게 됐다.

 여기서 그 유명한 용차 봉차 용단승같과은 전설의 차가 생산됐다. 당시 최고의 제조 기술이 적용됐고 제조 기술 진보와 함께 역대 복건전운시轉運使(복건로의 재정과 조운을 관장하던 관리)의 충성 경쟁이 이어졌다. 단, 소룡단, 용단승설 등은 황제의 하사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차였다. 민간에서 판매되지 않았으므로 금을 가지고도 구입할 수 없었다.

황제는 국가가 어려울 때조차 북원의 차를 고집했다.

1155년 남송은 금과의 전쟁으로 인한 국난극복과 사회 안정을 위해 일시적이지만 진공품 제도를 폐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황제였던 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공납으로 인해 백성의 수고가 많으니 모두 폐지하겠다. 그러나 복건의 공차만은 오랫동안 대대로 내려온 것이니 폐지하지 않고자 한다." 진공품 중에 오래되지 않은 것이야 없을 테지만, 유독 북원의 공차만은 계속 진상하라는 의지가 담긴 말이 아닐 수 없다.

중드 속 차마시는 장면


북원은 차 생산과 기술 면에서 선진 지역이었고, 계속해서 기술 혁신을 이루었다. 북원의 차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은 이곳이 품질 좋은 차나무가 생장하는 자연조건을 갖추기도 했지만, 식량 자급이 충분치 않아 상업과 무역의 발전이 꼭 필요한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복주와 천주泉州라는 활발한 무역항을 보유했던 것도 복건 상품 작물의 발전을 자극했다. 이러한 환경을 기반으로 황실차 공급지라는 명성은 지역 내 차 생산에 부담을 주기보다는 활기를 높였다. 북원 주변의 민간 다원은 번성했고, 어디원이 있는 곳이라는 명성을 안고 이곳 차는 전국으로 판매됐다. 당시 복건의 건차는 판매 지역이 가장 넓은 차였다. 이처럼 지금까지 이어지는 복건차의 명성은 그 유래가 매우 깊다.

한편 용단, 소룡단, 용단승설이라는 차 이름은 이후 조선 문인의 글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송 이후로도 명성이 이어져 모사품이 꾸준히 생산된 것이다. 특히 늦게까지 덩어리차를 즐기던 조선에서는 이들 차가 덩어리차의 대명사처럼 인식될 정도였다.

차의 고가 경쟁은 비단 고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현대에도 많은 고가의 차가 생산된다. 그 가운데 최고봉은 단연 보이차라고 할 수 있다. 보이차는 세균발효 과정을 거친 후발효차인데, 이러한 후발효차는 숙성 기간이 길수록 맛이 좋아지고 그 희소성 때문에 가치도 높아진다. 위스키가 숙성 기간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이치와 같다.

다양한 명칭으로 본 차



찻잎으로 만들 수 있는 차의 종류는 몇 가지나 될까? 보성차, 용정차, 보이차, 우지차, 재스민차, 다르질링차, 실론차, 말차 등등 이름만 봐도 다양한 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성 · 우지·.. 용정 · 보이 다르질링 · 실론 차는 모두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재스민차는 첨가되는 꽃 이름을 붙인 것이고, 말차는 가루로 된 차의 형태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같이 차 이름을 붙이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운남성 보이차
항저우 용정차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차가 생산되는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한국의 보성차, 일본의 우지차가 그런 경우다. 생산지 외에 차 집산지의 명칭이 차 이름이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중국 윈난 성의 보이차다..

찻잎의 모양 등 외형적인 특징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작설차는 찻잎의 모양이 참새의 혀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차는 찻잎의 둥근 모양이 진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투명한 유리잔에 몇 알을 넣으면 물에 불어 둥글게 뭉쳐진 차가 펼쳐지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우아하다. 입뿐 아니라 눈까지 호강시켜 주는 차다.

눈썹을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미차眉는 눈썹이 날렵한 동양미인을 연상시킨다.

자순차는 찻잎 모양이 뾰족한 죽순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은침차針茶는 솜털이 많은 찻잎이 은 바늘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역시 유리잔에 우린다. 은 바늘 같은 찻잎이 세로로 떠서 아래위로 부침을 거듭하는 모습을 눈으로 감상하며 마신다.

벽라춘은 푸른 찻잎의 꼬인 모양이 소라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고,

죽엽초는 찻잎이 댓잎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녹모란은 찻잎을 여럿 묶어서 둥근 모양으로 풍성하게 만든 차다. 차를 우릴 때 마치 커다란 모란꽃이 개화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리주전자에 넣고 여럿이 둘러앉아 화려한 꽃이 피는 모습을 감상하며 마신다. 어찌 보면 마치 고슴도치가 웅크리고 앉아 가시를 펼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외에도 원료인 차나무의 품종 이름을 딴 것이 있다. 수선水仙, 육계肉桂, 철관음鐵觀音, 대홍포大紅袍 등이 그런 차다.

또 이름만으로 그 찻잎을 딴 시기를 알 수 있는 차도 있다. 사전차社前茶는 춘분(3월 20~21일경) 전후에 딴 찻잎으로 만든다. 청명절(4월 4~5일경) 전에 따면 명전차라 하고, 곡우(4월 20~21일경) 전에 전차라고 한다.

이 글에서는 차의 매력과 종류 그리고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차는 이름이나 유래보다는 그 맛을 즐길 줄 아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중국은 화려함으로 마시고 일본은 형식으로 마시고, 우리는 정신으로 마시는 느낌이다.


다음 글에서는 차를 마시는 다구에 대해 알아보겠다.